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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군에 관한 기억((7) [ 2022.10.31 ]

[뉴스재팬=포사단필] 포쇄(曝曬)

햇볕이 좋은 가을, 하루 날을 잡아서 아버지의 유품을 곱게 싸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당신께서 연로하여 어머님과 함께 큰아들에게 의탁하고자 상경할 때 들고 오신 책 보따리다. 거실에 책 여남은 권¹⁾을 가을볕을 받고 바람을 쏘이도록 펼쳐놓았다.

무심한 나는 석성 향교의 전교를 두 차례 지낸 조부께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간직해온 서적이려니 하고 풀어보지도 않은 채 지냈다. 선친이 돌아가신 다음 여러 해 뒤에 풀어서 건성으로 뒤적여보다가 곧 자세를 바로 했다. 뜻밖에도 선친이 14세(1935, 을해년) 때 모범 서간문과 고문을 필사한 두 권의 육필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중한 자료였기에 곧바로 인사동에 가 장황하였다.

두 자료는 표지에 ‘乙亥 六月’이라고 쓰인 <簡禮> 와 ‘乙亥 七月 始’이라고 쓰인 <古文眞寶>다. <簡禮>의 속표지에 ‘乙亥 三月 始‘ 라고 쓰여 있고 제목은 <簡式問答>으로 되어 있다. 수신 상대에 따라 예를 갖춰 쓰는 서간문을 공부한 내용인데, 3월부터 쓴 글씨를 6월에 합철한 것으로 보인다.

<古文眞寶>는 ⌜古文眞寶⌝에서 뽑아낸 글의 필사본인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 귀거래사(歸去來辭), 시상부론(紫桑賦論),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 명선부(鳴蟬賦), 애련설(愛蓮說), 한문제불문창생문귀신론(漢文帝不問蒼生問鬼神論),²⁾ 어부사(漁父辭), 소진장의종횡론(蘇秦張儀縱橫論),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진정표(陳情表),³⁾ 이렇게 다양한 글의 육필이다. 이날까지 위 13편의 글 가운데 여섯 글은 제목조차 처음 보는 글이며, 일곱 글은 들은풍월로 내용은 대충 짐작할 정도이고, 그 번역문 단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스승이 동녘 집안의 종손에게는 출사표를 가르쳤고 서녘 집안 당신에게는 적벽부를 가르쳤다는 게 생전 선친의 회고였는데 필사본 말씀은 없었다.

30대 후반에야 겨우 아들을 본 조부께서는 이듬해 열다섯 살 아들과 하관 거창 신 씨가 여식의 혼인을 서두르셨다고 한다. 신부는 열여덟 살이었다. 신부 댁에서는 어린 신랑을 걱정했으나 언행이 너볏하여 흡족해 했다는 선비의 회고가 기억된다. 만년에 선친은 관광여행으로 장가계에 다녀왔는데 주련 등 눈에 띄는 글을 줄줄 풀어내시자 가이드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모시고 간 3남에게 대학에서 강의하셨느냐고 묻더라는 전언도 새삼스러워진다.

열네 살(1958), 나는 중학교 2학년으로 등하굣길 20 킬로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학기 초부터 방학 시작할 때까지 배운 단어를 20번씩 써오라는 영어 방학숙제가 귀찮아서 예컨대 ‘m’자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ind’를 네 번 내려 써서 제출한 게으르고 잔머리 굴리는 학생이었다.

이제 나이 80에 가까워 선친 어린 시절의 육필을 대하니 생전에 필사본을 알았더라면 부자간에 더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과 뉘우침으로 부끄럽고, 산에 계신 이날까지 자식을 가르치심이 고마워 거듭 고개를 숙인다.

전영규 칼럼니스트

주.
1) 도서 명세는 아래와 같다.
· 三學士傳.(宋時烈, 崇禎辛亥 七月).
· 石城三綱言行錄(己亥年, 1899 추정).
· 經書類抄 下(甲午仲春重刊).
· 海東歷代名家筆譜 六冊((編輯兼發行者 李斗鏞, 翰南書林, 大正 十五年).
· 最新文明尺牘((李冕宇, 永昌書館, 昭和 二年).
· 扶餘誌 二冊((發行兼著作者 扶餘郡廳, 昭和 四年).
· 朝鮮寰輿勝覽(著作兼發行者 李秉延, 昭和 八年).
· 闡美錄(著作兼發行者 全鎣湜, 全鎣湜家, 昭和 九年).
· 東獻備考(著作兼發行者 李秉斗, 東獻備考刊所, 昭和 十四年).

2) 처음 대하는 글인데 ⌜고문진보 후집⌝(황견 엮음ㅣ이장우·우재호·박세욱 옮김, 을유문화사, 2020)에는 들어있지 않다. “漢文帝不問蒼生問鬼神”의 뜻은 알겠으나 사연이 궁금했다. 賈生(賈誼) 관련 자료(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열전 ①, 민음사, 2011, pp.596-609)를 읽고, 당나라 시인 李商隱의 시 <賈生>의 결구 ‘不問蒼生問鬼神!’(孫洙 編/林東錫 譯註, 당시삼백수 3/3, 동서문화사, 2017, p.1097)을 읽으니 비로소 앞뒤를 이해하게 되었다. 필사본에도 “不問治民之道而問鬼神之本)이라는 구절이 보인다(사진 참조). 이어지는 한 구절이 ‘何其不思之甚也’인데, 군주가 나라 다스리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고작 귀신 따위에 관심을 두느냐는, 어찌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는 비판으로 이해된다. 21세기 이 땅에서도 不問治民之道而問不謝之策터니 나라에 황당하고 참혹한 일이 터졌다.

3) 이 글도 처음 대하는데 이밀(李密)의 생애를 약술한 내용과 본문의 앞 부분 열두 구절까지 필사하였다. 저자의 본명을 밀(密)로 밝혔으면서도 저자는 李太白으로 썼으니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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